✱Original text (Japanese) at the bottom.
감각의 벌판ㆍ형상의 벌판ㆍ한자의 벌판 - 안미자의 작품 세계
지바시게오(千葉成夫:美術評論家)
1. 한자의해체
안미자의 작품을 마주하고 여러분이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일것이다. 단순한 추상화는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의미 파악이 잘 되지 않는다. 바위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하고, 건축물 또는 구축물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풍경이라고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풍경을 조금씩 추상화한 것이라 볼수도있다.
한편, 그림물감 대신에 먹이 사용되었기에 「서예」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문자, 한자로써 읽을 수는 없지만,언듯, 한자의 단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생각으로 조금씩 몰두하다 보면 한자를 옆으로 쓰러뜨리거나, 한자 「획」중의 한 부분만을 그리거나, 「획」을 분해해서 떼어내기도 한 모양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 실은 안미자의 작품은 「한자」가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대부분어느 한자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그녀는 한자를 그대로, 잘읽을 수 있게쓰거나, 그리자 라고 마음먹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한자를 그대로 (읽을 수 있도록) 쓴다면(혹은 그린다면), 그것은 그림이 아니고 서예가 되어 버린다.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경우라도, 예를 들어, 「木」라는 한자에 대해서 「木」라고 인식할 수 있게 그리면, 누구라도 「木」를 연상해서, 그렇게 읽어버리기 때문에그것은 그린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한자가 근간이 되어있기는하지만, 보는 사람들이 판독할 수 없는 곳까지 그것을 해체한다.「문자」가아니고, 회화적인 것, 조형적인 요소로 만들 필요가 있기때문이다. 한가지 더, 그녀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한자로써 읽어버리면, 한자 문화권 이외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이된다. 한자를 해체하면, 회화적인 조형요소로 바꾸면, 한자를 읽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회화로써 수용될 길이 열린다. 그리고, 한자 문화권사람들에게는, 한자를 해체하면, 바꿔 말하면, 한자 탄생이전, 한자탄생 직전의 단계를 현전시키면, 한자는「문자」가 될 가능성과 함께, 「문자가아닌 조형」(즉,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될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미자 작품의 주제는 「한자의 해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한자의 해체 모습을, 해체할 한자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주제는 거기에 있다.
2. 한자의 생성, 자연으로부터의 이탈
안미자 작품의 근원에 자리잡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야기는 다소 길어진다. 여러분이 주지하는바와 같이, 한자는, 중국대륙에 있어서, 자연계 속의 다양한 그 대상의 「形」을 본떠서(象形)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川」은, 양쪽기슭과 물의 흐름을, 합계세개의 선으로 추상화해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상형문자」란, 현실의 그 형상을 그대로 본뜬 것이며, 동시에, 많든 적든 추상화한 것이다.이 추상화는, 물론 본래는상징화(심볼화)라는 것이었다. 주술ㆍ점ㆍ제사에 관계되는, 요컨대 종교적인 상징이다. (이 경우 「종교적」이란, 서구적 의미가 아닌, 기후, 천재지변, 식량의 수확 등을 좌우하는 자연계와의 관계에서 생겨난, 자연계에대한 인간의 「마음의 움직임」, 「의식의 존재법」이라는 의미다). 거기에서시작된,먼저 자연계의 주요한 대상(산, 천, 초목 등)과 인간생활주변의 주요한 것(의식주에 관련된 사물 등)에, 상형이라는 방법에 의해 문자를 부여해갔다. 아마도 그 다음으로 관념어(사랑,탄생,죽음등)가 명명되고, 각각 문자가 만들어져 갔을 것이다. 드디어 세상의 모든 대상에 각각의 문자가 부여되었다고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
문제는,한자가 사물의 구체적인 모양에서 유래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눈에 보이는 것의 형상(모습,형태)을 그대로 따라그려서 한자에 도달했을 때, 다른 한편 인간은 자연계로부터 이른바 한 걸음 멀어졌다고 말할 수 있기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강(강,川)을 아직 눈으로 보고 있고, 「소리로서의언어」도 아직 없었을 단계에서는, 이어서 소리로 「강」이라고 부르고 있었을 뿐인 단계에서는, 인간과 강은 직결하고 있었다. 눈앞에 새가 있다고 하면, 그때 인간과 새는 동격으로,인간은 새를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 중의하나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인간이 새를 먹을 때도 있었다면, 맹금류인 새가 인간을 덮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존재에「새」라고 하는 문자를 부여했을 때, 인간에게 있어서 새는 이미 자신과 같은 종류가 아니었다. 인간에게 명확한 「(자)의식」이 생겨나서,「타자」 라는 관념이 명확하게 된 것은, 대략그 즈음 이었을 것이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황하의 하남(河南)유역에서 기원전1300~1400년 즈음에 일어났던 것으로, 실은 현재로부터 그렇게 먼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자연계로부터 멀어져 간 것은, 과연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한 일이었을까,역사는 되돌릴 수 없지만? 그 이후, 인간은 급속한 「진보」를 이루어왔다. 그 대신, 자연과 직결하고 있던 행복은 상실되었다. 그때까지, 인간의 눈이 강이라든지 새를 보고 있을 때, 또한 대상에 「소리」를 부여했을 때까지, 인간의 눈은, 그것만으로 행복이었다. 충족하고 있었다. 거기서 하나의 반전이 일어난다. 인간은 자신이「주」(主)이고, 자연계의 대상들이 「종」(從)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될수록, 인간은 자연계와의 직결관계로부터 더욱 멀어져 갔다.
「보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인다고 하는 것, 시각을갖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태어나, 존재하고 있다는것은, 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데 그것(보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면, 자연이 그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했기 때문이며, 그 반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의 전도(轉倒)로 「보는것」을 인간 측의 주체적인 능력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인간에게「진보」라는 것을 가져다 주게 된 것이다. 그것도 사실이며,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실은 자연계가 인간을 끊임없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며, 인간의「시각」은참으로 그런 것의 반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눈(眼)」은, 「보는 것」은, 인간측에 가담하는 길을선택함에 따라서, 그 댓가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것이다 라고. 자연계와의 직접적인 연결이란 그런 것이며, 아시아 지역의 인간은, 현재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대략 3000~4000년 전에, 자연계와 그런 직결관계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창조는 쇠퇴의시작일 수 있다. 생성은해체의 시작일 수 있다.
3. 「보는」 것에서 「읽는」 것으로
한자의 생성,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멋진 일이다. 그탄생의 순간, 인간의 눈은 구세계와 신세계의 사이에 놓여졌던 것이라 말해도 좋다. 자연계와 직결하면서, 동시에 자연계가 눈에서 멀어져가는 극적인 체험을한 것이다. 「본다」라는 것이 발생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경험이다.
그때까지,자연계의 일부분이었던 인간에게는, 소위 주체적으로「본다」라는 일은 없었다. 주위의 무엇이 분명하게 망막에 비춰진 것은 확실하지만, 처음에는보이는 것에(소리에 의해서) 이름을 부여하는 것조차할수없고, 뒤이어「소리」로 부르는 능력은 획득했지만, 「문자」에 의해서 보다명료하게 만들 능력은 아직 없었다. 처음에는 「의식」이 수반 되지 않고,다음엔 「자각」이 수반되어있지 않았다. 「주체적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고 망막에 비춰져 있는상태는, 「보인다」고 해야 할 수동적인 상태다. 하나하나의대상을 본떠서 형상을 부여해가는 동안, 인간은 주체적으로 「본다」라는 능력을 획득해갔다. 한자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전개ㆍ진화 시켜간다는 것은, 이 능동적인 「본다」라는 능력을 전개해가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상형)문자를 본다는 것은, 즉「읽는다」는 것이다. 「의미」를 부여하는것, 「의미」를 확인 하는 것이다. 자연계 속의 물의 흐름을 오랫동안 「강」이라 발음했다고 해서, 소리의 「강」과상형문자인「川」과의 사이에는, 본래 인과 관계(因果關係)와없다. 다양한 「새」가 있는데, 그것들을하나로 묶어서 「鳥」라는 글자를 만들어내기 전에, 존재했던 것은 예를 들어, 「닭」, 「참새」, 「개똥지빠귀」,라고 하는 소리였다.(이 순서는 역순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강」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을 「川」이라고 쓰는 것은, 눈앞에 있는 「강」을 보고 있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시각을 떠나, 그 의미를 「읽다」라는 것으로 시프트(shift)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상형 문자는 보는 것이 아니고 읽는 것이 되었다. 읽는 것이 되었을 때야말로 한자의 성립이라고 해도 좋다. 상형문자는 필연적으로 「회화성」으로부터 이탈해 간 것이며, 그와 함께 「기호화」의 정도를 높여갔다. 지금까지는 그저「보고」있었을뿐이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보이는데보지 않고, 읽게 된 것이다.
4. 원초(맨 처음)로의꿈
우리들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자는, 그렇게 해서 이미 3000년 이상이 경과 된 것이다. 안미자는 그렇게 되기 전의 한자, 맨 처음에 존재했던 한자가 있던 곳까지 시간을 돌려보고 싶어한다. 그리하여한자가 품고 있었던 잠재적인 조형성을, 다른 가능성을 파헤치고 싶기에,한자를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해체는 단순히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망가뜨려서 그 흔적조차도 없애려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해체는 해야만 한다. 「산」이라고 불렀던 것에 일단 「山」이라는문자를 부여하면 「山」은 기호가 되어버려, 그 「조형성」이 약해져 간다. 그러나 상형문자(表意文字)는 「사물의형상」을 남기고(残) 있다.혹은 후세에 남기고(遺) 있다. 남아 있는 그 「조형성」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한자를, 그 구성요소를, 그 문자라고 판단할 수 없는 곳까지 해체할 필요가있다. 그러나 하나하나 해체하는 것은 아니다. 한자가 본질적으로갖고 있는 조형성, 또는 구성력을 돌려놓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자가한자로 되기 전, 그것은 「상형(象形)」대상을본 뜨는 것, 즉 「회화」였다. 「상형(象形)」은 「원초적인 회화」로서 시작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상형」=「회화」가 어느 시점까지도달한 곳에서, 한자의 방향과 회화의 방향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 사건의 전체를 조망해서 말하자면,커다란 흐름, 주류를 이루고 있던 것은「회화」라는 흐름이고,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한자가 갈라져 나왔던 것이다. 한자에 조형성이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게 나뉘어진 후, 오랜 시간을 거쳐서, 한자는 중성적인 기호로 근접해 간다. 그러나 상형의 단계나 초기단계의 한자에는, 놀라울 만한 생명력, 막 태어난 신선한아름다움, 아직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조형성이 있었을 것이다. 나개인의 판단을 말하면, 한자는 예서체까지,그 생명력과 신선함, 조형성을유지하고 있었다. 해서체라는 「제도화」가한자로부터 그러한 의미의 생기를 빼앗아 간 것처럼 생각된다. 역으로 말하면, 해서체의 성립에 의해서 한자는 마침내,「분리」를 완료한 것이다.
5. 세계를 조형적으로 추상화하다.
인류의 미술의 흐름을 「시각」의 측면에서 아주 간단히 정리해보면,그것은 눈에 보이는 대상의 형상을 그대로 본떠서 표현해 온 역사였다. 외계(外界)에 있는 대상의 형태(形)를 그대로 재현하는것,즉, 재현주의, 또는 리얼리즘 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외계(外界)를 통째로 묘사해 내는「사진」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 미술 사상은 서구를 중심으로 해서, 대략 20세기에 끝이 났다. 혹은 한 사이클을 돌아 그 역할은 끝났다. 미술계에서는「회화의 종말」이라고 부르고 있다. 때문에 현재, 본질적인 의미에서 성실한 화가들은 모두, 象形, 재현주의, 리얼리즘이 아닌 회화,그러한 것과는 다른 방법, 또는 사상에 의해서, 전혀다른 새로운 회화를 만들어 내려고 분투하고 있다. 그런 상황아래, 동양인의한 사람인 안미자는 한자의 조형성에 주목(着目) 한다. 그 회화적 조형성에 주목한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한자는 사진과 같이 사물의형태를 똑같이 그대로 통째로 모방해서 성립했던 것이 아니다. 실은 현실계(現實界)의 대상을 매우 추상화하고 있다. 이 「추상화」라는 것이 중요하다. 본래의 모습 그대로라면 본래의 모습을 떨쳐버릴 수 없고, 자립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추상화하면, 본래의 형상에서 동떨어진 기호가 되어버린다. 자립하는 것은 좋지만, 자기 자신 속에만 갇혀버려, 본래의 모습은 고사하고,세상마저 잊어버린다. 한자는 그런 것이 아니라,이른바 조형적으로 추상화한 것이다.(기호적인 추상화는 그 이후 계속되어졌던것에 불과하다).무엇을 이라고 말하자면, 자연계, 현실계의 다양한 대상을 거의 전부, 라고. 한걸음 더 나아가 말하면, 이 세계 자체를 조형적으로 추상화 한것이다.
안미자는 한자가 갖고 있는 이 「조형적인 추상화」의 힘에 의지해서 하나의 회화를 만들어내려고하고 있다. 그녀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이미 성립해 있는 한자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해체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높이 쌓여진 나무 더미를 손으로 확 밀어버리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로,간단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해체한다」것 자체가 작품으로, 「회화」가되는 것이어야만 한다. 방법으로써, 그녀는 먼저 하나의 한자를선택한다. 그리고 그 「점과 획」을, 그 한자에 맞도록 무너뜨려간다. 해체해 간다. 그때 그녀의 「시각」속에는, 한자 성립시의 최초의 상황이 겹쳐지는 것은 아닐까. 해체가 지난과거의 창조를 환기시킨다.
아주 먼 옛날, 누군가가, 자연계의 어떤 특정한「대상」을 보면서, 그 구체적인 형태를 그 형상에따라서 추상화 했다. 윤곽을 따르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그대상 또는 그 형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선을 추출하는(선으로 추상화하다)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 추상화란, 그「대상」자체를 공간 속에 남기면서, 그것으로부터 「선」이 되었던 엣센스를 끌어내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 「대상」과 무엇인가의 위에 그려진(=쓰여진) 「선」이란, 그 시점에서는 여전히 자연공간 속에 존재했다.그와 동시에, 무엇인가의 위에 그려진(=쓰여진) 「선」은, 자연공간과는다른 「공간성」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훨씬 오래 전에 이것을 이룩한 그 누군가, 이 천재적인 누군가는, 물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자의 창출이란, 특정의 인간이 아닌, 자연이 이룩한 일이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이「자연공간과는 다른 「공간성」이야말로 「회화의 공간」이 되어 있던 것이다. 그리고 3000년이상이 경과하고 있다. 이젠 본래의 모습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6. 회화와 한자 사이
한 가지 부연해 두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나의이 소론에서는 이야기를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자연 속에 형태가 있는것, 형태가 명확한 것에서 생겨난 한자 중에서, 가능한 단순한 것을 예로들어왔다. 木, 川, 鳥, 山 등이다. 회의 문자, 형성문자, 가차문자는 피했다.그런데 안미자가 선택한 한자는 「見」 「無」 「生」 「有」 「心」등이다. 그 대부분은 「見」 「無」 「生」 등 실체를 특정 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 한자 라고 말해도 좋다. 그 의미에서 「관념어」에 포함된다. 심장의 형태에서 유래하는「心」은, 그 의미로 말하면, 관념과 실체를 함께 갖는 특수한 한자 라고 해도 좋다.이들 한자는, 그녀가 살아오는 동안 그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질문하거나, 그녀가 무엇인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느끼거나 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 「무엇」이란, 그 한자들의 「의미내용」 뿐만이 아니다. 요컨대, 그녀는 그러한 한자들로부터 「의미내용」 뿐만이 아닌 것, 감히 말하자면, 오히려 그렇지 않은것을 지속적으로 느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녀가 그러한 한자의 「해체라는 표현」을 하는 것은, 두 가지의 이유 또는 동기에 의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의미 내용」에 관련된다.그녀 자신의세계관의 토대가 되는 것은 『주역』(『역경』) 의「물극필반(物極必反)」 「종즉유시(終則有始)」 「항구불이(恒久不已)」라고 하는 언어, 사상이라고 한다. 즉 그것이 「의미 내용」인 것이다. 둘째는 한자의 「모양」에관계된다. 예를 들면, 「無」라든지 「有」라는 한자는, 그 「모양」 자체 속에 「종즉유시(終則有始)」의 사상을 잉태하고 있다.그 「모양」 그 자체가 「종즉유시(終則有始)」의 사상을 이루고 있다.한자라는 이것이, 단순히 「본뜨다」라는 것만이 아닌, 상형문자의특이한 점이다. 한자는, 아니 「한자화(漢字化)」는 적어도 그 최초 시점에서는, 단지기호(화)가 아닌, 사상의 「내용」 그 자체였다.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한자의 기호로서의 중성화 진행에 따라서, 그것은 엷어져 가버렸다. 그래도 한자는여전히 원리적으로는 그러하다. 그녀는 그렇게 해서 엷어져 눈에 들어오기 힘들어져 버린 것을, 해체를 통해서 제시하려는 것이다. 결국, 그녀 자신의 의도는, 회화와 한자(서예)가 인접한, 서로 겹쳐지는 영역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7. 한자가 깃드는 회화 공간
그런데 나는, 이러한 안미자의 시도가 예기치않게, 「의미 내용」의 저편까지 도달하는 건 아닐까? 라고생각한다.‘그것’이라고 읽을 수 있는 모양을 남겨두는 한, 그것은결국 한자이며 회화는 아니다. 한자는‘그것’이라고 읽을 수 없어졌을 때 비로소「형상」그 자체가 된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그녀는 그러한 것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無」라든가 「有」라는한자가 본래부터 갖고 있는 분위기, 의미가 아닌, 그 의미가만들어내는 「분위기」를 표현하려고 한다. 이 「분위기」는, 형상에의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공간」에 의해 떠맡게 된다. 「형상」에서발산하는 것은 그것을 담을 것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공간」이야말로 표현해야만 한다. 그것은 물론, 「회화」에 의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의미 내용의 저편」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하게말하면, 한자가 그곳으로부터 생겨난 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그 「공간」은한자만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공간」은 「자연계」와동일함(equal)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념의 레벨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간」을, 먼저 「벌판과 같은 확산」이라고해두자. 안미자의 시도는 거기까지 도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안미자는 필연적으로 역 방향으로부터, 「벌판과같은 확산」의 방향으로부터 한자 창출의 맨 처음으로 향한다. 바꿔 말하면, 어디까지나 「회화 공간」의 문제로써, 한자 원초의 공간으로 향한다. 따라서 그녀가 한자를 해체한다는 것은, 한자의 「형상」을 「공간」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이다.그녀는 「공간」내용으로서, 「한자」또는 「한자라고하는 현상(現象)」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안미자의 주제(主題)가한자의 해체다 라고 알고 작품을 볼때, 여러분은, 해체되고있는 한자의 점과 획만을 본다 라고 하는 것은 없다. 점과 획이 해체되어 가는 드라마가 전개되고 있는화면 전체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화가는 점ㆍ획에 해당하는 부분 이외의 「여백」(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실은 「여백」이 아니라, 회화에서는「地」라고 부른다. 점ㆍ획에 해당하는 부분은 「도(圖)」라고 한다.)을 꼼꼼하게 그리는 것으로 체력적으로, 시간적으로, 사상적으로 대단한 노력을 쏟아 붓는다. 「地」가 살아있지않으면 「도(圖)」와의 사이에 긴장 관계가 생기지 않고, 회화로서 충분한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회화 공간」의 탐구는 말할 것도 없지만, 안미자와 같이 한자의 해체를 통해서가 아니어도 가능할것이다. 안미자는 동양의 한 사람의 현대화가로서, 「근대회화」가 끝난 지금, 그녀의 감각이 스스로에게 「원점은 여기다」라고 알리는 곳, 한자의 원초(맨 처음)라는 시점에 초점을 고정한다. 서구적인 회화 사상에 따른 회화의 원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오히려 세계 속에서, 지금까지 회화라고 생각해 오지 않았었던 것, 예를 들면, 동양의 한자를 탐구해 갈 때, 한자가 갖는 추상성, 상형이라는 점에서 생겨나는 조형성에 새롭게, 커다란 가능성이 있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다.
이전에 「상형」이 그대로 직선적으로 회화에 전개되었던 것이 아닌, 분기점으로써든 아니든, 한자를 만들어낸 것이 흥미 깊다. 일단, 한자라는 하나의 정점을 밟고, 그러나 거기로부터 문자로도 가지 않고, 상형적인 회화로도 가지 않은길―그것은 현실의 역사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가능성이 있다고 안미자는 생각한다.
8. 물질이 만들어내는 공간성
한 가지 여러분들이 알고 있었으면 하는게 있다. 회화는 물질적인 예술이다. 적어도 그림물감과 그 무언가의지지체(벽, 나무판, 종이, 천 등)가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완성된 그림은 「물질+α」의 그 무엇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물질에 지탱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작품은 변해간다. 동양화는 보통, 종이(한지)나 천(비단)에 먹 또는 자연 안료(현재는 화학 합성의 것도 있다)로 그린다. 다만, 종이나 천에 사전준비가 필요하다. 먹이나 안료의 스며듦을 방지하기도 하고, 조절하기 위해서「밑 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백반과 아교를 섞은 액체를 종이나 천에 칠한다. 보통은 1회나 2회 칠하지만, 화가에 따라서는 각각 자신들만의 방법이 있다.
그러한 점에서 안미자의 방법은 특이하다. 우선, 비단이 아닌, 생 면천을 사용한다. 게다가 「밑 칠」을 하지 않는다.생 면천 위에 직접 먹물로 그려가는 것이다. 면천은(특히 그녀가 사용하는 두꺼운 면천은)비단과 비교할 때 먹물이 스며들기 힘들고, 컨트롤도 쉽지 않다. 생 면천이면 더더욱 그렇다. 마치 일부러 어렵게 작품을 만들려는 듯 보이지만, 그녀에게 있어서그것이 감각에 가장 잘 부합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그녀의 그림을 감상할 때에 특별히알고 있지 않아도 좋을지 모른다. 처음 나도 그런지 모르고 그녀의 작품을 보았다.거기서 「강하다」는 인상을 받고, 무엇 때문일까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방법을 알고 난 후, 「강함」은 그녀의 물질적인 방법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부드러운 비단, 매끄럽게 그릴 수 있도록 하는 밑 작업」과, 그녀의 방법을 놓고 보면, 그녀의 작품은 물질성이 표면으로 나온다. 그녀 자신에게 있어서 그것은 물질성을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감각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지만, 요컨대 「자, 자유롭게 마음껏 그리세요!」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방법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직감적으로, 물질 과의 격투 속에서야 말로 「공간」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기 쉬운 지지체가 준비되어 있어서, 그리는 행위에만 집중하는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는 행위 그 자체는 지지체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 안미자의 생각일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로, 고대의 동굴벽화는 울퉁불퉁한 벽에 그려져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밑칠」된 화면에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그녀는 자주 그렇게 말한다. 즉, 「밑 칠」되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이미 회화가 되어있는 것이다. 적어도 회화의 「地」가 성립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회화가 시작되는, 그 전 상태로부터 시작하고 싶어한다. 울퉁불퉁한그대로의 벽에 그려진 고대 동굴 벽화가 갖고 있는 물질성은, 바꿔 말하면, ‘자연성’인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회화란 다른 「공간성」을 거기에 만들어내고 있다. 단순한 평면성이 아닌 공간성이다. 안미자가 실현하고 있는 것은 그런 표현, 그러한 공간성을 가진 회화인 것이다. 물질성은 필연적인 것이다.
9. 「의미」 가 「감각」으로 변모하다
한자의 생성이란, 자연계에 존재하는 현실의 대상을, 거기에서 떼어내어, 하나의 추상적인 것, 현실이 아닌 것이 된다는 의미였다. 그것에 대해 안미자의 작품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예를 들면, 모티브가 「木」이라는 한자라고 하자. 그녀가 그 한자의 형상을 해체해 갈 때, 먼저 확실한 것은, 추상적 기호인 「木」이라는 형상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木」과는 매우 상이한 형상으로 전개해 갈지도 모르고, 본래현실의 木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되어갈지도 모른다. 그어느 쪽이라 해도, 이른바 추상회화적으로 되지 않으며,「구체적인 형상」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뚜렷하고 구체적인 무언가는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녀는 컨트롤하고 있다. 왜냐하면, 木이 변모하여, 예를 들어 걷는 요괴 같은 것이 된다면, 흔한 재미없는 서구적 변모(Metamorphose)에 지나지 않고, 본래의 木과 비슷한 다른 것이 된다면,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일에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구체화되는듯 하면서, 실은 구체화시켜가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거기에 「형상」과 「형상이 되지 않는」것의 사이라는 지평이 태어난다. 이것이야말로, 그녀 작품의 특이한「공간」의 내용이다.
그와 동시에, 「木」으로부터 멀어짐으로 인해, 「木이라는 의미」는 엷어져, 애매하게 되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안미자 자신은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에 조형력을 지닌 한자를, 작업을 시작한 실마리로써 손을 놓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동시에, 그것은 엷어지면서 애매하게 되어,「의미」의 바깥쪽으로 비껴갈 때도 있다. 아니, 바깥쪽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 「사이」를 행해서 간다.그리고 「사이」라는 공간속에서, 그것은 이윽고 「감각화」된다. 「木이라고 하는 의미」가 「형상」과 「형상이 되지 않는 것」의 「사이」라는 공간 속에 던져짐으로 인해 그러한 것이발생한다. 「의미」가 「의미」를벗어나 「감각화 된 무엇인가」로 변모해 간다. 「의미」가 「감각의확산」속으로 융화되어 간다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들이 안미자의 작품에서 보고 있는 「형상」은, 대부분「형상」이라기보다 「감각의발현」으로 변모해 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 있어서 핵심적인 변모란, 오히려이 변모해 가는 과정이다. 즉, 굳이 말하자면,그녀는 「형상」도 「의미」도 모두 감각의 벌판으로 해체, 혹은 해방시키려고 시도한다.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은, 바로 그곳이다.「회화」라는 것에 조차 구애 받지 않고,「조형」이란 무엇이었던가 라는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번역:김윤숙)
感覚の原野・形の原野・漢字の原野-安庭炫(美子)の作品
千葉 成夫(美術評論家)
1 漢字の解体
安庭炫の作品を前にして皆さんがまず思うのは「これは何だろう?」ということだろう。単なる抽象絵画ではないみたいだが、何が描かれているのかがよく判らない。岩のように、樹木のように、建築物とか構築物のように見えることもある。風景と見るのはかなり無理があるが、風景を少し抽象化したものと見えなくはないかもしれない。
他方、絵の具の代りに墨が使われているので「書」のような感じがしなくもない。字、漢字としては読めないのだが、ふと、漢字の断片のように見えることがある。そう思ってよく見てみると、漢字を横倒しにしたり、一部分の「画」だけ描いたり、「画」を分解して引き剥がしたりした、そんなものに見えてきたりする。そう、じつは安庭炫の作品は「漢字」が元になっているのである。
ただ、ほとんどはどの漢字と特定できない。彼女は漢字をそのまま、ちゃんと読めるように書こう、描こうと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らである。漢字を、そのまま(それと読めるように)書いたら(描いたら)、それは絵ではなくて書になってしまう。書くのではなく描く場合でも、例えば「木」という漢字について、「木」と判別できるように描くと、誰でも「木」と連想して、そう読んでしまうから、それでは描いたことにはならない。
彼女の作品では、漢字が元になっていても、判読できないところまでそれを解体する。「字」ではなくして、絵画的なもの、造形的な要素にする必要があるからである。もう一つ、彼女自身が言っていることだが、漢字として読めてしまうと、漢字文化圏以外の人々を排除することになる。漢字を解体すれば、絵画的な造形要素に変成させれば、漢字を読めない人々にも絵画として受容する道が開かれる。そして漢字文化圏の人々には、漢字を解体すれば、いいかえるなら漢字誕生以前、漢字誕生直前の段階を現前させれば、漢字は、「文字」になる可能性とともに、「文字でない造形」(すなわち「絵画」と言うべきだろうが)になる可能性をも孕んでいたことが見えてくるのである。それゆえ、安庭炫の作品の主題は「漢字の解体」ということにほかならない。彼女は漢字の解体の様子を、解体する漢字を、描いている。主題はそこにある。
2 漢字の生成、自然からの離脱
安庭炫の作品の根にある思想を理解するために、話は少し長くなる。皆さん良く知っているように、漢字は、中国大陸において、自然界のなかのさまざまなものを、その「形」を象ること(象形)から生れた。例えば「川」は、両岸と水の流れを、あるいはたんに水の流れを、合計三本の線にまで抽象化して表したものである。だから、「象形文字」とは、現実のものの姿形をそのまま象るものであり、同時に多かれ少なかれ抽象化するものである。この抽象化は、むろん元は象徴化(シンボル化)ということだった。呪術・ト占・祭儀に関わる、要するに宗教的な象徴である。
(この場合の「宗教的」とは、西欧的な意味においてではなく、天候、天変地異、食料の収穫などを左右する自然界との関わりから生れた、自然界にたいする人間の「心の動き」、「意識の在り方」という意味である)。
そこから始まって、まずは自然界の主要なもの(山、川、草木など)と人間生活の周囲の主要なもの(衣食住に関わるのものなど)に、象形という方法によって文字を与えていった。おそらくはその次に観念語(愛、誕生、死など)の命名がなされ、それぞれに文字が作られていっただろう。やがて世界のなかのすべてのものにそれぞれ文字を与えていった。そのように推定することができる。
問題は、漢字がものの具体的な形に由来している点にある。というのも、人間が眼に見えるものの形をそのままなぞって漢字に到達したとき、他方で人間はじつは自然界からいわば一歩離れてしまったと言いうるからである。眼の前の川を、まだ眼で見ていて、「音としての言語」もまだ無かった段階では、次いで音で「かわ」と呼んでいただけの段階では、人間と川とは直結していた。眼の前に鳥がいるとして、そのとき人間と鳥とは同格で、人間は鳥を自分と同じもののひとつだとみなしていた。人間が鳥を食べることもあれば、猛禽類の鳥に人間が襲われたことだってあっただろう。そういう存在に「鳥」という文字を与えたとき、人間にとって鳥はもう自分の同類ではなかった。人間にはっきりとした「(自)意識」が生れ、したがって「他者」という観念が明確になったのは、だいたいそれと同じ頃だったに違いない。アジア地域では黄河の河南流域で紀元前1300~1400年頃に起ったことで、じつは現在からそんなに遠いことではない。
そうやって自然界から離れていったのは、果して人間にとって幸福なことだったのだろうか、歴史は不可逆だけれど?それ以降、人間は急速な「進歩」を遂げてきた。その代り、自然界と直結していた幸福は喪われた。それまでは、人間の眼が川とか鳥を見ているとき、またものに「音」を与えたところまでは、人間は、眼は、それだけで幸福だった。充足していた。そこに一つの転倒が起る。人間は、自分が「主」で自然界のものたちが「従」であると思い始めたのである。そして、そのように考えるようになればなるほど、人間は自然界との直結の関係からさらに離れていった。
「見ること」もまた同じだった。眼が見えるということ、視覚を有っているということは、人間がそのように生れ、存在しているのは、この自然界で生きるのにそれが必要だったからである。いいかえるなら、自然がその能力を人間に与えたからであって、逆ではなかった。だが、一つの転倒が「見ること」を人間の側の主体的な能力と勘違いさせてしまった。そして、逆説的なことに、それが人間に「進歩」といわれるものをもたらすことになった。それも事実であり、不可逆なことである。それでも僕は思うのだ-じつは自然界の方が人間をずっと見続けているのであり、人間の「視覚」は本当はそのことの反映、裏返しにすぎない、かもしれないと。「眼」は、「見ること」は、人間の側に加担する道を選んだことによって、その代償として多くのものを喪ってしまっているのだ、と。自然界との直結とはそういうことであり、アジア地域の人間は、現在から遡っておおよそ3000~4000年前に、自然界とのそういう直結の関係から離れ始めてしま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創造は衰退の始まりでありうる。生成は解体の始まりでありうる。
3 「見る」ことから「読む」ことへ
漢字の生成、いうまでもなく、それは素晴らしいことだった。その誕生の瞬間、人間の眼は旧世界と新世界との間に置かれたのだといっていい。自然界と直結しながら、同時に自然界が眼から離れてゆく、そんな劇的な体験をしたのだ。「見る」ということに起った、人類史上、空前絶後の体験である。
それまで、自然界の一部分だった人間には、いわば主体的に「見る」ということはなかった。周囲のものがちゃんと網膜に映っていたことは確かだけれど、始めは見えているものに(音によって)名前を与えることすらできず、次いで「音」で呼ぶ能力は獲得したが「文字」によってより明瞭にする能力がまだ無かった。始めは「意識」が伴わず、次には「自覚」が伴っていなかった。「主体的に見る」のではなくて網膜に映っている状態は、「見える」と呼ぶべき受動的な状態である。個々のものを象って形を与えてゆくなかで、人間は主体的に「見る」という能力を獲得していった。漢字を生み出してそれを展開、進化させていくことは、この能動的な「見る」能力を展開させることだった。
それだけではない。(象形)文字を見るとは、つまりは「読む」ことである。「意味」を与えること、「意味」を確認することにほかならない。自然界の水の流れを永いあいだ「かわ」と発音していたとして、音の「かわ」と象形文字の「川」とのあいだには、元々は因果関係はない。さまざまな「とり」がいるのに、それらをひとまとめにして「鳥」という字を作り出す前は、存在していたのは個々の例えば「にわとり」、「すずめ」、「つぐみ」という音だった(この順序は逆だったかもしれないが)。そうして、「かわ」と呼んでいたものを「川」と書くのは、眼の前にある「かわ」を見ていることから離れることである。視覚を離れて、その意味を「読む」ことへとシフトすることである。かくして、象形文字は見るものではなく読むものとなる。読むものとなったときこそが、漢字の成立であるといってよい。象形文字は必然的に「絵画性」から離脱していったのであり、それに伴って「記号化」の度合いを強めていった。いままではたんに見ていただけなのに、眼に見えるものを読み始めたのだ。見えているのに、見るのではなくて読む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
4 原初への夢
僕たちがいま手にしている漢字は、そうやって既に3000年以上が経ったものにほかならない。安庭炫はそうなる前の漢字、原初の漢字のところまで時間を戻してみたい。戻して、漢字が孕んでいた潜在的な造形性を、他の可能性を掘り起してみたいから、漢字を解体するのである。だから、この解体は単純に壊すということではない。でも、壊して跡形も無くしてしまうことではないとはいえ、解体は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ま」と呼んでいたものにいったん「山」という字を与えてしまうと、「山」は記号になってしまい、その「造形性」が弱まっていく。それでも、象形文字(表意文字)は「ものの形」を残している。あるいは遺している。残っているその「造形性」を再び呼び戻すためには、漢字を、その構成要素を、その字であるとは判読できないところまで解体する必要がある。しかしバラバラに解体するのではない。漢字が本質的にもっている造形性、ないし構成力を呼び戻さ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である。
漢字が漢字になる前、それは「象形」、ものを象ること、つまりは「絵画」だった。「象形」は「原初的な絵画」として始まったと推定できるからである。とすれば、「象形」=「絵画」が、ある時点まで来たところで、漢字の方向と絵画の方向とに分れたのである。
この出来事の全体を見渡していうなら、大きな流れ、主流を成していたのは「絵画」という流れであり、ある時点でそこから漢字が枝分れした。漢字に造形性が残っているのは、このためである。
枝分れの後、永い時間を経て、漢字は中性的な記号に近づいていく。しかし象形の段階や初期段階の漢字には、驚くべき生命力、生れたばかりのみずみずしさ、まだ生きて動いている造形性、があった筈である。僕個人の判断をいえば、隷書体までは、漢字はその生命力とみずみずしさと造形性を保っていた。楷書体という「制度化」が漢字からそういう意味での生気を奪ってしまったように思われる。逆にいうと、楷書体の成立によって漢字はやっと「枝分れ」を完了したのである。
5 世界を造形的に抽象化する
人類の美術の流れを、「視覚」の側面からごくごく簡単に整理してみると、それは眼に見えているものの形をそのまま象って表現してきた歴史だった。外界のものの形をそのまま再現すること、即ち再現主義、ないしはリアリズムということである。その究極で、外界をまるごと写し取る「写真」が登場した。そして、しかしこの美術思想は、西欧を中心にして、20世紀でだいたいで終った。あるいはワン・サイクルを回り終えて、その役割は終った。美術界では「絵画の終焉」と呼ばれている。それゆえ、現在、本質的な意味で真面目な画家たちはみんな、象形、再現主義、リアリズムではない絵画、それとは異なる方法、ないし思想によって、まったく新しい絵画を生み出そうと苦闘している。そんな状況下で、東洋人の一人である安庭炫は漢字の造形性に着目する。その絵画的造形性に着目するのである。よく考えてみれば、漢字は写真のようにものの形をそっくりそのまま、まるごと象って成立したのではない。じつは、現実界のものを非常に抽象化している。この「抽象化」ということが重要である。元の形そのままだと親離れできず、自立できない。といって、完全に抽象化すると、元の形から離れた記号になってしまう。
自立したのはいいが、自分のなかだけに閉じこもって、親どころか世間まで忘れてしまう。漢字はそうではなく、いわば造形的に抽象化したのである(記号的な抽象化はその後に続いたにすぎない)。何をかといえば、自然界、現実界のさまざまなものを、ほとんどそのすべてを、だ。もう一歩進めていえば、この世界そのものを造形的に抽象化したのである。
安庭炫は、漢字がもっているこの「造形的な抽象化」の力に託して一つの絵画を作り出そうとしている。彼女は「神」ではないから、既に成立している漢字から始めるほかはない。だから「解体する」ことから始める。これは、積み上がった積み木を手でグシャっと壊すこととは話がちがって、簡単なことではない。むしろ、「解体する」こと自体が作品に、「絵画」になる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手順としては、彼女はまず一つの漢字を選び出す。そして、その「点画」を、その漢字にいわば合うように崩していく。解体していく。そのとき彼女の「視覚」のなかでは、漢字成立時の原初の状況が重な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解体が往昔の創造を喚起する。
遙かな大昔、誰かが、自然界のある特定の「もの」を見ながら、その具体的な形を、その形に沿って抽象化した。輪郭をなぞるという場合もあっただろうし、そのものあるいはその形の中核をなしている線を抽出する(線に抽象化する)という場合もあっただろう。その時、その抽象化とは、その「もの」じたいを自然の空間のなかに残しがら、そこから「線」となったエッセンスを引っ張り出すという独創だった。その「もの」と、何かの上に描かれた(=書かれた)「線」とは、その時点では、まだ依然として自然空間のなかに在った。と同時に、何かの上に描かれた(=書かれた)「線」の方は、自然空間とは異なる「空間性」を帯び始めてしまっていた。遙かな大昔にこれを成し遂げた誰か、この天才的な誰かは、もちろんそのことに気づいてなどいなかった。その意味では、漢字の創出とは、特定の人間ではなく、自然の為した業だったと言うべきかもしれない。
この「自然空間とは異なる空間性」こそ、「絵画の空間」となっていったのだ。そして、3000年以上が経過している。もう元には戻れない。
6 絵画と漢字のあいだ
ひとつ、付け加えておいたほうがいいかもしれない。僕のこの小論では、話を判りやすくするために、自然のなかの形のあるもの、形がはっきりしているものから生れた漢字のなかで、なるべく単純なものを例に挙げてきた。木、川、鳥、山などである。会意文字、形声文字、仮借文字は避けた。
ところで、安庭炫が選び出す漢字は「見」「無」「生」「有」「心」などである。その多くは「見」「無」「生」など、実体を特定できないものを指し示す漢字といっていい。
その意味で「観念語」に入る。心臓の形に由来する「心」は、意味からいって観念と実体とを併せ持つ、特殊な漢字といっていい。
これらの漢字は、彼女が生きてくるなかで、彼女に何かを問いかけたり、彼女の方が何か判らないものをそこに感じたりした、そういうものである。そしてその「何か」とは、それらの漢字の「意味内容」だけではない。つまり彼女は、それらの漢字から「意味内容」だけではないもの、あえていうならむしろそうではないものを(も)感じ続けてきた、ということだろう。そこで、彼女がそれらの漢字の「解体という表現」をするのは、二つの理由、ないし動機によるということができる。第一は「意味内容」に関わる。彼女は、自分の世界観の土台になっているのは『周易』(『易経』)の「物極必反」「終則有始」「恒久不已」という言葉、思想である、と言う。つまり、それが「意味内容」にほかならない。
第二は、漢字の「形」に関わる。例えば「無」とか「有」という漢字は、その「形」そのもののなかに例えば「終則有始」の思想を孕んでいる。その「形」そのものが「終則有始」の思想を成している。これが、漢字という、たんに「象る」だけではない象形文字の特異な点である。漢字は、というよりも「漢字化」は、少なくともその原初の時点では、たんなる記号(化)ではなく、思想の「内容」そのものだった。時代が下るにつれて、漢字の記号としての中性化の進行につれて、そのことは薄れてきてしまっている。それでも漢字はなお、原理的にはそういうものである。彼女は、そうやって薄れて見えにくくなってしまったものを、解体を通して示そうとしている。
つまり彼女自身の意図は、絵画と漢字(書)とが隣接し、重なり合う領域のなかに、新たな可能性を探るということである。
7 漢字が宿す絵画空間
ところで、僕は思うのだが、こういう安庭炫の試みは、期せずして、「意味内容」の向う側にまで届くのではないだろうか? それと読める形を残しているかぎり、それはついに漢字であって絵画ではない。漢字はそれと読めなくなったところで「形」そのものになる。この差は決定的である。彼女はそのことをよく判っているから「無」とか「有」という漢字がもともと持っている雰囲気、意味ではなくて、その意味が生み出す「雰囲気」を表現しようとしている。この「雰囲気」は、形によってではなく、根本的には「空間」によって担われる。「形」から発散するものはその受け皿を必要とする。だから「空間」をこそ表現しなければならない。それは、勿論、「絵画」によってしかなしえないことである。
「意味内容の向う側」とは何だろうか? それは、単純化していえば漢字がそこから生れた空間ということである。そして、言うまでもないけれど、その「空間」は漢字だけを生んだのではない。ただし、この「空間」は「自然界」とイコールではない。僕が語っているのは理念のレヴェルのことだからである。そういう「空間」を、とりあえず「原野のようなひろがり」と呼んでおこう。安庭炫の試みはそこまで届いている。
安庭炫は、それゆえ必然的に逆の方向から、「原野のようなひろがり」の方向から、漢字創出の原初に向う。いいかえれば、あくまでも「絵画空間」の問題として、漢字の原初の空間に向う。だから、彼女が漢字を解体するのは、漢字の「形」を「空間」に差し戻す、ということである。彼女は、「空間」の事柄として、「漢字」、あるいは「漢字という現象」を考えているのだ。
安庭炫の主題は漢字の解体だと知って作品を見るとき、皆さんは、解体されつつある漢字の点画に当るものだけしか見ない、などということはない。点画が解体されていくドラマが展開している画面全体を見る。そして画家は、もちろん点画に当る部分以外の「余白」(それは、だから本当は「余白」ではなくて、絵画では「地」と呼ぶ。点画に当る部分は「図」である)をちゃんと描くことに、体力的にも時間的にも思想的にも、大きな努力を注ぎ込む。「地」が生きていないと「図」との間に緊張関係が生れず、絵画として十全なものにはならないからである。
「絵画空間」の探求は、いうまでもないけれど、安庭炫のように漢字の解体を通してでなくても可能であろう。安庭炫は、東洋の一人の現代画家として、「近代絵画」が終った今、彼女の感覚が彼女に「原点はここだ」と告げているところ、漢字の原初という時点に焦点を定める。西欧的な絵画思想によって絵画の原点へ遡ってもあまり意味がないと考えているからだ。世界のなかで、むしろこれまで絵画と考えられてきたものではないもの、例えば東洋の漢字を探っていくとき、漢字のもつ抽象性、象形であることから生れる造形性に、あらためて、大きな可能性がある。彼女はそう考えている。
かつて「象形」がそのまま直線的に絵画に展開したのではなく、枝分れとしてであれ漢字を生んだことが興味深い。いったん漢字というひとつの頂点を踏んで、しかしそこから文字にも行かない、象形的な絵画にも行かない道-現実の歴史では、それは起らなかった。しかし今、そういう可能性がある。安庭炫はそう考える。
8 物質が生む空間性
皆さんに知ってもらいたいことが一つある。絵画は物質的な芸術である。最低限、絵の具となんらかの支持体(壁、板、紙、布など)がなければ成立しない。完成した絵は「物質+アルファ」のものになっていることはいうまでもないが、そうなっても依然として物質に支えられてもいる。だから、どんな物質を、どう用いるかによって、作品は変ってくる。東洋画は、ふつう、紙(韓紙)や布(絹布)に墨および自然顔料(現在は化学合成のものもある)で描く。ただし、紙や布に下ごしらえが要る。墨や顔料の滲みを押えたり調節したりするために「ドーサ引き(礬水引き)」ということをするのが普通である。簡単にいうと明礬と膠を混ぜた液を紙や布に塗る。普通は1回か2回塗るのだが、画家にはそれぞれ自分のやり方がある。
その点で、安庭炫の方法は特異である。まず、絹布ではなくて生まの綿布を使う。さらに「ドーサ引き」をしない。生まの綿布の上に直に墨で描いていくのである。綿布は(とくに彼女が用いている厚い綿布は)絹布と比べると墨が乗りにくいし、コントロールも容易ではない。生まだと余計にそうである。まるで制作をわざわざやりにくくしているみたいだが、そうではなく、彼女にとってはそれが彼女の感覚にいちばんしっくりするからだという。これは、皆さんが彼女の絵を鑑賞する際には別に知らなくてもいいことかもしれない。
僕も、はじめはそうとは知らないで見た。そこから「強さ」という印象を受け取って、どうしてだろうと思ったものだった。彼女のこの方法を知って、「強さ」は彼女の物質的方法に由来することがわかった。「柔らかい絹布、滑らかに描けるための下塗り」と、彼女のやり方とでは、彼女の作品の方が物質性が表に出る。彼女自身にとってはそれは物質性を際立たせるためではなくて感覚的な選択によるのだが、つまるところ直感的に、「どうぞ、自由に、思い切り描いて下さい」というのとは正反対のやり方を欲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だろうか。直感的に、物質との格闘のなかにこそ「空間」を生み出す可能性がある、と考えている。描きやすい支持体がお膳立てされていて、描く行為だけに集中すればよいというのも、ひとつの考え方である。でも、彼女はその道を採らない。描く行為そのものは支持体との関係のなかで為されるべきであると、そう考えているのだと思う。参考までに、古代の洞窟壁画はでこぼこのままの壁に描かれている。
「ドーサ引き」された画面には独特の雰囲気がある。彼女はよくそう言う。つまり、「ドーサ引き」されるだけで、それはすでに、いわば絵画になっているのである。少なくとも絵画の「地」が成立してしまう。しかし、彼女はすべての絵画が始まる、その前の状態から始めたい。でこぼこのままの壁に描かれた古代の洞窟壁画がもっている物質性は、それゆえ、言葉を換えてみるなら自然性ということである。それが、僕たちが知っている絵画とは異なる「空間性」を、そこにもたらしている。たんなる平面性ではない空間性である。安庭炫が実現しているのはそういう表現、そういう空間性をもった絵画なのである。物質性は必然なのである。
9 「意味」が「感覚」に変容する
漢字の生成とは、自然界の現実のものが、そこから引き離されて、ひとつの抽象的なもの、現実ではないものになる、ということだった。それにたいして、安庭炫の作品のなかで起っているのはどういうことなのか?
例えばモチーフが「木」という漢字だとする。彼女がその漢字の形を解体していくと、まず確かなのは、抽象的な記号である「木」という形からは離れていくことだ。それでどうなるかというと、それとは非常に異なる形に展開していくかもしれないし、元の現実の木に類似してはいるが別の何かであるものになっていくかもしれない。どちらにしても、いわゆる抽象絵画的にはならずに、「具体的な形」は残り続けるだろう。だからといって、はっきりと具体的な何かにはならない。そうはならないように彼女はコントロールしている。だって、木が変容して、例えば歩く妖怪みたいなものになるとしたら、ありふれた、面白くもない西欧的なメタモルフォーゼにすぎないし、元の木に類似している別のものになるとしたら、フィルムの逆回しにすぎないからである。つまり、具体化していくようでいて、じつは具体化していかない。だからこそ、そこに「形」と「形ならざるもの」の間、という地平が生れる。それこそが、彼女の作品に特異な「空間」のなかみである。
それと同時に、「木」から離れることによって、「木という意味」は薄れ、曖昧になる。それでも、それは消滅することはない。少なくとも安庭炫自身は、「意味」を表すがゆえに造形力をもっている漢字を、とっかかりとして手放さないはずだからである。ただ、同時に、それは薄れ、曖昧になり、「意味」の外側にずれてもいく。いや、外側へ向ってではなくてその「間」のなかへ向って、である。そして、その「間」という空間のなかで、それはやがて「感覚化」される。「木という意味」が、「形」と「形ならざるもの」の「間」の空間のなかに投げ込まれることによって、そういうことが起る。
「意味」が、「意味」を離れて、「感覚化された何か」に変容していく。「意味」が、「感覚のひろがり」のなかに溶け込んでゆく、と言ってもいいかもしれない。だから、僕たちが安庭炫の作品上に見ている「形」は、ほんとうは、「形」というよりは、「感覚の現れ」へと変容しつつあるもの、なのである。
彼女の作品における核心的な変容とは、むしろこの変容の方である。つまり彼女は、あえていうなら、「形」も「意味」もすべてを感覚の原野へと解体、あるいは解放しようとしている。新しい絵画の可能性は、そこにしかない。「絵画」ということにすらこだわらずに、「造形」とは何であったかというところから始める。始め直すの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