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의 빛 - 안미자의 회화를 언급하며


‘회화를 본다’는 경험은 늘 두 번째의 경험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훌륭한 회화와 만났을 때, 그것이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작품이면서 우리들은 확실히 그 회화와의 해후가 없다면, 그 경험은 얻을 수 없다. 형용하기 어려운 그리움을 느껴왔던 존재였던 것은 아닐까. 모든 원초의 경험, 즉, 최초의 경험은 언제나 선험적 경험으로서, 우리들 기억의 심층에 끊임없이 감도는 이룰 수 없는 두 번째의 시선을 계속해서 지녀왔다고 말하면 좋을까. 즉 우리는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재회하여 왔던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회화란 그 재회의 빛으로 칭해야 할 기억의 발로인 것이다.
안미자의 회화도 또한 그러한 회화 경험의 신비에 대해서 언급한다. 깊은 철학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것은 동양적 언어로 말하면, 동양의 수묵적인 몸짓에 의해 인용한 한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담아서, 각각 상형으로부터 해방시켜, 마치 극대와 극소를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우주의 빛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 빛의 기억도 또한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며, 재회라고 말해야할 그리움을 전하며 멈추지 않는 것은 안미자가 무아의 경지에서 축적해온 자연 관조, 그러한 시선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로도 통하는 정신활동에 의해, 그 빛과 재회하고 무의식의 층에서 우주적 구조의 신비에 닿아왔던 것이다.
이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우주를 「분자」로 그것을 지탱하는 공간으로서의「공허」 라는 장소, 이「공허」 야말로 틀림없이 앞서 이야기한 선험적인 기억을 받아들이는 장소에 다름 아니다. 만물의 의미이자 상형이기도 한 그「분자」 를, 비가시의 「공허」라는 바다에 풀어놓은 예라 할 수 있는 안미자의 작업은 바로 우주의 기억이며, 구조 그 자체인 회화의 원형으로서 「지금, 여기」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망막에 스며들어오는 재회의 빛. 우리들은 그 빛의 그리움에 우주의 심연으로 확산되는 회화의 예감에 흔들리게 된다. 그것은 어딘가 인간존재의 그리움과도 닮아, 조심스럽지만, 우주 만물의 원초를 생각하게 하는 빛임에 틀림없다.


미나미시마 히로시 (미술평론가, 여자미술대학교수)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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