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text (Japanese) at the bottom.
文字と絵画
- 아시아적인 것으로 보편에이르다.-
山脇一夫(美術評論家)
안미자의 작업은 먹에 의한 검은색의 모노크롬 회화이다. 생 면천의 굵은 올에 엷은 먹이스며들어있다. 그 위에 검은 형상이 떠오르듯 보이며, 또다른 작품에서는 생 면천의 엷은 회색이 그대로 배경이 되어 그 위에 검은 형상이 그려져 있다. 검은형상은 먹물을 수없이 겹쳐 태어난 것이다. 먹물은 그을음의 입자를 물에 섞어 만든 것이지만, 그을음의 입자를 두께가 있는 생 면천의 올에 시간을 들여 서서히 스며들게 한 후, 입자를 쌓아 올려 가는 것으로 복잡한 뉴앙스를 얻을 수 있다고 안은 말하고 있다.
엷은 먹의 색과 회갈색의 생 면천으로부터 떠오르는 그 검은 형상은, 어떤 기분 좋은 그리움에 의해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나는 먹의 독특한 색과 마티에르가 나의 마음을 가라앉혀, 기분 좋은 정적 속으로 유도하기 때문일 것이다. 「惺惺ㆍ寂寂」이라고 하는 그녀의 모든 작품에 붙여진 타이틀처럼 「惺惺ㆍ寂寂」이란, 「깨어있으려는 노력과 곧은 마음을 지향하려는 마음가짐」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또한 먹의 색은 표면적인단순한 검은 색이 아니라 심원한 색이며, 인생을 포함한 우주 전체에 무한한 움직임을 불러 일으키는 『玄』 (*3)이라고 한다.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검은 형상은 추상적인 형태를 하고 있지만, 인공적인 분위기는 느낄 수 없다. 그것은 추상적이면서도 관념적이지 않고, 낯설지 않고, 친근감 있고, 마음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해준다. 그것이 한자의 일부분에 있다는 것은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듣고 난 후에도 어떤 문자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한자의 일부에 있다는 것은 어쨌거나 납득하게 하며, 또한 한자의일부에 있다는 것이 내게 기쁨을 전해주고 있다는 것으로써 수긍하게 한다.
「그녀는 문자를 해체해서 그 한 글자한 글자에 대하여많은 에스키스를 하고」 (*4)그 여러장의 에스키스로부터그리고자 하는 형태를 선택해 낸다고 말한다. 원래 문자가 무엇에 있는가는 작가인 그녀밖에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해체 된 문자가 이른바 징후적으로 문자의 의미를 감지하게 한다는 것도있을 수 있다. 문득 손에 넣은 토기의 파편이 그 원래의 모습을 실재로 지각하게 하는 것이상으로 명료하게 헤아릴 수 있게 하는 것처럼」(*5)이라고.
바로그와 같은 경우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작품을 본 이상은 그와 같은 것은 좀처럼 없을것 같은 느낌이 든다. 원래 문자와의 연결은 문자 형태의 배후에 더욱 깊은 곳에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즉 무의식의 세계, 그것도 공동체의 무의식, 즉 융이 말한 집합적 무의식의 수준인 것이다. 그녀는 말하고 있다. 「내가 추구하고 있는작업은 한자의 근원에 있는 풍부하고,보편적인 상징성을 매개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로. 보는 이에게 권유하는 시도인 것이다.」 (*6)라고. 그래, 그것은 동아시아의 한자문화의 공동성이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노우에유이치나(井上有一), 모리타시류(森田子龍), 이시가와규우요(石川九楊)이외에는, 서예와 마주했던 경험이 없다. 그러나 나의 무의식 속에는 그것뿐만이 아니라,어린 시절부터 축적되어왔던 서예와의 관계가 잠재해 있어서, 그것이 토기의 파편 형상으로 촉발되는 것처럼 의식 위에 되살아났던 것이다.
그녀는 서예가 갖는 본질적인 성질로써 의미성, 시간성, 일회성을들고 있지만, 그녀의 작품에는 그 어느 것과도 관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러한 것들의 서예의 특징이 현대인인 나를 서예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안은 회화를 서예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것을 현대로 되살아나게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은 이노우에유이치도 그와 같은 서예가 갖는 회화성에 매료되어 그와 같은 작품을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작품에 응축 되어있는것, 그것은 오랜 역사 속에서 배양 되어져왔던 서예가 갖는 형태로써의 매력을 회화로써 추려내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서예가이면서 그는 당연한것이 문자의 의미에 대해서 고려했으며, 또한 서예의 시간성 일회성을 버릴 예정도 없었다. 안미자의 작품은 회화로써, 유이치의 작품에 대해 음화의 관계에 있다고생각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은 능동적인 서예 작품에 대하여, 수동적인 회화에 의해서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동성을 현대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자 문화권의 인간으로써, 작품의 원래 한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그녀의 작품을 깊이 받아들일 수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한자 문화권 안에서의 이해를 넘어 나아가 보편적인 것으로 연결되기를 기원 하고 있다. 그녀는 「한자 문화권의 공동성에 의거한 제작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7)라고 말하고, 그 이외의 문화권 사람들에 대해서도 작품의 매력이 전해질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할것인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를 그녀는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상형문자인 한자는 자연계 전체의 상징이며, 자신의 작품에 한자를 모티브로 하는 것은, 확실히 그 때문이라고말 할 수 있다. 한자는 삼라만상의 상징에 있으며, 그로 인해 제작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라고.(*8) 더욱이 다음과 같은 후쿠나가코우지(福永光司)의 말을 그 근거로써 인용 하고 있다. 「한자는 단순한 부호 또는 기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천지조화의 이법을 상징하고 삼라만상을 질서 짓게하는것, 초월적인 신의 세계에 들어가, 조화자연의 움직임과 서로 조응하며, 심원한 철학성을 밑바탕에 갖고 있는 것이었다.」(*9)즉 한자가질서, 조화, 자연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 의해서, 인류 전체가 그녀의 작품을이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2년전 일본에 소개된 바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보리지니의 화가인 에밀레웅그와레를 생각해 낸다. 그녀는 원래 프로의 화가가 아니었다. 본래우리들이 생각하는 프로 화가라는 것은, 아보리지니의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토지의 장로로써 사람들과 함께 종교적인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회화는 확실히 아보리지니의 자연과 관계된 전통 속에서,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는 종교적인 의식인 산드페인팅 또는 바디 페인팅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이 자연을 근저에 갖고 있는 것에 의해 아보리지니의 생활, 종교도 알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조차 감동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한자가 자연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 의해서, 안미자의 작품도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가볍게 보편성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것을 그 근원까지 깊게 이해하는 것에 의해 불가사의 하게도 타자의 공감이나 감동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은아닐까. (번역:안미자)
安美子 展 MasayoshiSuzuki Gallery(愛知県岡崎市)
2010年3月6日(土)- 4月5日(月)
文 字 と 絵 画
アジア的なものによって普遍へと至る
山脇一夫:美術評論家
安美子の絵画は黒のモノクロームである。黒い色は墨汁である。目の粗い生綿布に薄く墨が沁み込んで、その上に黒い形象が浮き上がって見える。別の作品では生綿布の薄い灰褐色がそのまま地になりその上に黒い形象が描かれている。黒い形象は墨汁を何十回も塗り重ねて生まれたものである。墨汁は水に煤の粉を混ぜたものであるが、「粉の粒子を厚みのある生綿布の織り目に時間をかけ徐々に沁みこませ、あるいは、積み上げるように重ねていくことで複雑なニュアンスを得ることが出来る」(*1)と安は語っている。
薄い墨色や灰褐色の生綿布から浮き上がってくるその黒い形象は、ある心地良さ、ある懐かしさによって私の心を捉える。しかしそれが何であるのかはまだ分からない。一つは、墨の独特の色とマチエールが私の心を落ち着かせ心地良い静寂の中へと導くからであろう。「惺惺ㆍ寂寂」という彼女のすべての作品につけられたタイトルのように。「惺惺ㆍ寂寂」とは、「目覚めようという努力とまっすぐな心を志向する心構えである」(*2)と彼女は言う。また「墨色は、表面的な単純な黒色ではなく、深遠な色であり、人生を含む宇宙の全域に無限の働きを呼び起こす『玄』の色」(*3)ということである。
薄明の中から浮かび上がってくる黒の形象は抽象的な形をしているが、人工性は感じさせない。それは抽象的であるけれど、観念的ではなく、よそよそしくなくて親しみがあり、心を喜びで満たしてくれる。それが漢字の一部であることは、それを聞くまで分からなかった。聞いた後でも何という漢字であるかは分からない。しかしそれでも漢字の一部であることは何となく納得させられる。そして漢字の一部であることが私に喜びをもたらしてくれるものの正体としても納得させられる。
彼女は文字を解体して「その一文字一文字について無数の下書きをし」(*4)そこから描く形を選び出すという。元の文字が何であったかは作者である彼女しか分からない。しかし彼女は言う。「解体された文字が、いわば兆候的に文字の意味を感じ取らせることもあり得るのだ。ふと手にした土器の断片が、その元の姿を実際に知覚する以上に明瞭に祭知させるということがあり得るように」(*5)と。
確かにそのような場合があるかもしれない。しかし私が彼女の作品を見る限りではそのようなことはめったにないような気がする。元の文字と結びつきは、文字の形の背後のもっと深いところにあるような気がする。つまり無意識の世界、それも共同体の無意識、つまりユングが言う集合的無意識のレベルにおいてである。彼女は語っている。「私が追求している制作は、漢字の根源にある豊かで普遍的な象徴性を介して、目に目ない世界へと見る者を誘う試みなのだ」(*6)と。そう。それは東アジアの漢字文化圏の共同性ではないかと私は思う。
私は井上有一や森田子龍や石川九楊以外に、書と向き合った経験はない。しかし私の無意識の中には、それだけではなく幼い頃から積み重ねられてきた書との関わりが眠っていて、それが土器の断片の形象に触発されるように意識の上に蘇ってくるのだ。
彼女は書の持つ本質的な性質として、意味性、時間性、一回性を挙げているが、彼女の作品にはそのどれもが欠けている。しかし振りかって考えてみれば、それらの書の特徴が、現代人である私を書から遠ざけているともいえ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安は書を絵画の領域に引き入れることによってそれを現代に蘇らせているとも言える。実は井上有一もそのような書の持つ絵画性に魅せられてその作品を作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彼女作品に凝縮されているもの、それは長い歴史の中で培養されてきた書の持つ形としての魅力を絵画として取り出すことであ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しかし書家である彼は当然のことながら、文学の意味について考慮したし、また書の時間性、一回性を捨てるつもりもなかった。安美子の作品は絵画として、有一の書の作品に対して陰画の関係にあると思われる。彼女の作品は、能動的な書に対して受動的なかいがによって東アジア文化圏の共同性を現代に受けとめているのだ。
私は漢字文化圏の人間として、作品の元の漢字が何か分からなくても彼女の作品を深く受けとめる事ができたのだと思った。しかし彼女は自分の作品が漢字文化圏の中での理解を越えて、さらに普遍的なものつながることを願っている。彼女は「漢字文化圏の共同性に依拠した制作を目指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7)と語り、それ以外の文化圏の人々に対してもその作品の魅了が伝わることをめざしている。
しかしそんなことが、果たして可能だろうか。それを可能にする理由を彼女は次のように語っている。「象形文字としての漢字は自然全体の象徴であり、自作が、漢字をモチーフとするのは、まさにそのためであるといえる。漢字は、森羅万象の象徴であることによって、制作の重要な契機となるのである」(*8)と。さらに次のような福永光司の言葉をその根拠として引用している。「漢字は単なる符帳あるいは記号に止まるものではなく、天地調和の理法を象徴し、森羅万象を秩序つけるもの、超越的な神の世界に参入して、造化自然の働きと互いに照応する深遠な哲学性を根底に持つものであった」(*9)。つまり漢字が造化自然を基本にしていることによって人類すべてが彼女の作品を理解する可能性を持つというのだ。
ここで私は、2年前に日本に紹介されたオーストラリアのアボリジニの画家エミーレㆍウングワレーを思い出す。彼女はもともとプロの画家ではなかった。そもそも私たちが考えるようなプロの画家というものはアボリジニ社会には存在しなかった。彼女は土地の長老として人々ともに宗教的な儀式を執り行っていたに過ぎない。彼女の絵画はまさにアボリジニの自然と関わりの伝統の中で、自然と人間とを結ぶ宗教的な儀式であるサンドㆍペインティングやボディ ㆍペインティングの中から生まれたものである。それが自然を根底に持つことによって、アボリジニの生活も宗教も知らない私たちにも感動をもたらすことができるのだ。それと同じように、漢字が自然を基盤にしていることによって安美子の作品も普遍性を持つといえるのかもしれない。いたずらに普遍性を求めるのではなく、固有のものをその根源にまで深めることによって不思議なことに他者の共感や感動を引き出す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 注
(*1)安美子「絵画と書―境界線上の制作」(女子美術大学美術研究科博士学位論文2009年3月)48項
(*2)安美子「 惺惺ㆍ寂寂 」GALLERY KOBYASHI 2008年
(*3)安美子「絵画と書―境界線上の制作」(女子美術大学美術研究科博士学位論文2009年3月)47項
(*4)安美子 前掲書 45項
(*5)安美子 前掲書 46項
(*6)安美子 前掲書 42項
(*7)安美子 前掲書 42項
(*8)安美子 前掲書 40項
(*9)福永光司『中国の哲学ㆍ宗教ㆍ芸術』人文書院、1988年196項( 安美子前掲書38項より引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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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美子 展
Masayoshi Suzuki Gallery(愛知県岡崎市)
2010年3月6日(土)~4月5日(月)
*REAR no.24 2010 (2010年8月6日発行)
…芸術批評誌(芸術ㆍ批評ㆍドキュメント)